1부) 5-5. 계획된 실패들: FTX, 실리콘밸리은행, 루나

거대한 전환의 역사에는 언제나 파열음이 존재한다. 새로운 질서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구조나 성급한 선두주자가 신뢰를 잃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루나, FTX, 실리콘밸리은행(SVB)의 사태는 단순한 실패 사례일까? 아니면 전환을 가속하기 위한 불가피한 계기였을까?

루나: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의 붕괴와 새로운 기준의 탄생

2022년 5월, 한국에서 출발한 루나(LUNA)와 테라(UST)는 단숨에 시가총액 수십 조 원 규모의 생태계로 성장한 후, 단 일주일 만에 붕괴했다. 이 사건은 알고리즘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이 현실 세계의 변동성과 수요 불균형을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 붕괴가 단순한 기술적 실패가 아니라, 기존 금융권의 배후 개입, 조직적인 공매도, 그리고 미국 제도권 바깥에서 움직이며 충돌을 야기했던 창업자 권도형에 대한 정리 과정이 작용했다는 해석도 제기되었다. 실제로 루나 붕괴 당시에는 특정 월가 세력의 공매도 개입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이후 미국 SEC는 권도형에게 강경한 법적 조치를 취했다.

흥미로운 대조는 바이낸스다. 바이낸스는 본사 소재지, 운영 구조, 내부 거래 정보 등에서 높은 수준의 투명성을 보여주지 못해 규제당국의 비판을 받아왔지만, 이후 규제 당국과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며 미국 시장에 편입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그 결과 미국의 제재에서 일정 부분 살아남았고, 결과적으로 ‘친미적인 생태계’와 ‘저항적 생태계’에 대한 운명 차이가 더욱 뚜렷해졌다.

이 사건 이후로 미국과 EU는 디지털 자산 법제화를 속도감 있게 추진했고, 규제 당국은 “불안정한 알고리즘형 스테이블코인과 담보 기반의 안정형 스테이블코인을 구분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결국 루나 사태는 탈중앙형 스테이블코인의 한계’를 부각시키며, 규제 질서의 필요성을 각인시키고, 미국 주도의 담보형 스테이블코인을 정당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FTX: 신뢰 붕괴를 통한 제도화의 정당화

2022년 11월, 세계 2위 암호화폐 거래소 FTX는 돌연 파산했다.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는 정치권과 규제기관, 그리고 월가 자본과 긴밀히 연결된 인물로, FTX는 한 때 세계 3위권 거래소이자 업계의 제도화 흐름에 가장 가까운 플랫폼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파산 이후 밝혀진 구조는 충격적이었다. 사용자 자산과 기업 자산의 불법 혼용, 자회사 알라메다 리서치와의 내부 거래 남용, 대규모 정치자금 기부, 불투명한 회계 등. 이는 단순한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넘어, 암호화폐 산업 전체에 대한 신뢰를 붕괴시키는 구조적 파탄이었다.

그리고 이후의 흐름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FTX 붕괴 이후, 미국은 SEC와 CFTC를 앞세워 바이낸스, 코인베이스, 크라켄 등 주요 거래소들을 본격적으로 규제망에 편입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FTX의 붕괴는 무규제 탈중앙 플랫폼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붕괴시키고, 미국 주도의 규제 질서로의 편입을 정당화한 전환 계기로 기능했다.

루나 사태가 탈중앙 스테이블코인의 실패를 상징했다면, FTX는 탈중앙 거래소의 도덕성과 통제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던진 사건이었다. 이 둘은 공통된 방향으로 제도권 개입의 명분을 제공했다.

실리콘밸리은행: 유동성 위기 속 드러난 새로운 질서

2023년 3월, 미국의 중견 은행 실리콘밸리은행(SVB)이 전격 파산했다. 표면상으로는 급격한 금리 인상과 자산-부채 미스매치가 원인이었지만, 그 여파는 암호화폐 시장으로 즉시 확산되었다. 특히 USDC 발행사인 서클(Circle)의 준비금이 SVB에 예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USDC는 일시적으로 달러 페깅을 이탈했지만, 곧 미국 정부의 유동성 보장 시사와 함께 빠르게 복원되었다. 이 사건은 디지털 달러 인프라가 위기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복구될 수 있음을 실증한 사례로 평가되며, 사실상 민간형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비공식적 정부 보증을 인식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 세 사건은 모두 ‘충격’으로 남았지만, 그 충격 이후에는 일관된 방향의 질서 재편이 이어졌다. 탈중앙화는 제도화로, 무규제 시장은 감독 체계로, 민간 유동성은 공공 보증으로 수렴했다. 따라서 이들을 단순한 실패로 보기보다는,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프레임을 정착시키는 전환 장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실패는 언제나 우연인가? 혹은 어떤 실패는, 설계된 구조 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계기’로서 준비된 것이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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